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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린 사람들

하얀연꽃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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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 쪽방촌 골목.

문도 열기 전부터 환자들이 줄을 서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입구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건강보험 가입자는 다른 병원을 이용해 주십시오."

돈 없는 사람만 오는 병원. 요셉의원. 그리고 그 병원을 21년간 지킨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


◆ 평양에서 태어난 아이

선우경식은 1945년 7월 3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 직후였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났습니다.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대구 피난민 수용소에서 5년을 지낸 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전쟁으로 외삼촌을 잃은 부모님은 아들이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길 바랐습니다.

피난민 수용소에서 자란 아이가, 훗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의사가 됐습니다. 그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돌아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 미국에서 돌아온 이유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내과 전문의가 됐습니다. 미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탄탄한 삶이 보장됐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턴 시절부터 이미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환자들을 돌려보내야 하는 현실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것도 미국에는 응급환자에 대한 의무 치료 제도가 있어 돈이 없어도 환자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였습니다.

더 나은 의료 시스템을 보고 싶어서 미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 처음에는 신림동이었다

많은 분들이 영등포 쪽방촌을 요셉의원의 시작으로 알고 있지만 처음은 신림동이었습니다.

1983년 서울 신림동 철거민촌 의료봉사를 계기로 노숙자와 극빈층을 위한 의료봉사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8월 서울 관악구 신림1동 동사무소 자리에 요셉의원을 처음 열었습니다. 1997년 신림동에서 영등포동으로 이전했습니다.

신림동에서 10년, 영등포에서 11년. 21년 동안 같은 일을 했습니다.


◆ 밥을 주기 시작한 이유

처방전에 방한 점퍼, 달걀, 용돈이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밥을 주기 시작한 계기가 따로 있었습니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에게 피를 뽑고 검사하는 것이 죄스러워 그때부터 요셉의원은 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고 약에 밥까지 주니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굶은 환자에게 주사기를 꽂는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 미안함이 밥상이 됐습니다.


◆ 60번 넘게 입원한 환자

알코올 의존증 노숙인들은 치료가 쉽지 않았습니다. 같은 환자가 수십 번씩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습니다.

많게는 60번 넘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환자들에게 선우경식 원장은 단순한 처방 이상의 것을 건넸습니다. 그는 진료실에서 항상 "과거엔 무슨 일을 했는지", "가장 잘하는 장기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환자 개개인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어 존엄을 되돌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직업도, 재능도, 자존감도 함께.


◆ 김수환 추기경 명의의 병원

요셉의원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병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표 명의가 김수환 추기경이었습니다.

외상으로 달아둔 약값을 몇 달 동안 갚지 못하자 제약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도대체 김수환이 누군데 돈을 안 갚느냐"는 전화였습니다. 선우 원장은 이 일을 두고 "내가 여기서 도망가면 누가 하겠나 싶어 계속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도망가면 끝이라는 생각 하나로 버텼습니다.


◆ 이재용이 눈물을 참은 날

2003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상무)이 호암상 수상을 계기로 요셉의원을 방문했습니다. 선우 원장은 단칸방에 사는 단골 환자의 집을 함께 찾았습니다. 술에 취해 잠든 남자와 맹장 수술을 받은 아주머니, 아이 둘이 있는 방 안을 살펴본 이 회장은 신음 소리를 내며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동행한 삼성 직원은 이것이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은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이 회장은 "이렇게 사는 분들을 처음 본 터라 충격이 커서 머릿속이 하얗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1,00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넸고, 이후 다달이 월급의 일정액을 기부해왔습니다. 이 사실은 본인의 당부로 20년 넘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2024년 전기 출간으로 처음 공개됐습니다.

선우경식의 삶이 한 사람의 마음을 20년짜리 선행으로 바꿨습니다.


◆ 상을 거부했다가 받아들인 이유

한미참의료인상 1회 수상자로 만장일치로 선정됐을 때, 선우 원장은 처음에는 수상을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노숙자 환자들을 위한 쉼터를 건립하기 위해 모금 중이었고, 상금을 전액 쉼터 건립에 쓰기로 하고 수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을 위한 상이 아니었습니다. 환자들을 위한 돈이었습니다.


◆ 평생 자가용 없이, 독신으로

선우경식 원장은 평생 자가용도 없이 작은 진료 가방 하나만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일생 동안 독신으로 오로지 환자들만을 위해 무료 진료에 투신한 모습에서 '쪽방촌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미국 전문의, 대학 교수.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스를 탔습니다. 진료 가방 하나 들고.


◆ 요셉의원은 지금도 있다

그가 떠난 후에도 요셉의원은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그가 타계한 이듬해인 2009년 신완식 박사가 후임 원장을 맡았고, 현재는 고영초 박사가 2023년부터 원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2025년 영등포동 쪽방촌 일대의 재개발이 확정되자, 영등포동에서의 진료를 끝내고 용산구 동자동 서울역 14번 출구 근처로 이동해 지금도 운영 중입니다.

현재 의사 120명을 포함한 연인원 600여 명의 자원봉사자와 후원자 약 6,700명의 도움으로 하루 평균 100여 명이 진료받고 있습니다. 개원 초기부터 지금까지 정부 기관이나 지자체 지원 없이 순수 민간 후원만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뿌린 씨앗이 이제 6,700명의 후원자와 600명의 봉사자로 자랐습니다.


◆ 오늘 우리에게 선우경식이 전하는 메시지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환자야말로 진정 의사가 필요한 환자입니다. 그런 환자들이 내 인생의 꽃봉오리였습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 그때가 가장 필요한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자가용 없이, 독신으로, 버스를 타고 쪽방촌으로 향하던 그 의사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 곁에 꽃봉오리가 있습니까. 그것을 알아보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 온도도 1도 더 따뜻해졌기를 바랍니다. 🌿


 

 

쪽방촌의 성자, 선우경식 원장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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