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님 설법

 

스님설법 내가 번뇌를 버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번뇌가 나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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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정, 삶의 활력을 주는 염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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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정, 삶의 활력을 주는 염불선

 

 

1.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추구한 일이 불행을 초래하고, 살려고 발버둥친 일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 되기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삶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나그네 길에서 안내자가 없으면 목적지를 바로 옆에 두고도 지나쳐 버리거나 헤매일 때가 많다. 인생의 나그네 길 또한 마찬가지이다. 삶의 목적도 삶의 바른 길도 알지 못하고서는 방황과 고통의 세월은 멈출 수 없다.

 

 우리가 불법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길 잃은 나그네가 길잡이를 만난 것과 같고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구조선을 만난 것과 같다.

 보물이 표시된 지도를 손에 넣은 사람이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문명의 발달은 인간생활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만들어가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 불안과 공허감은 점점 커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바쁜 생활속에서도 명상과 수행의 모임을 기웃거리고 일년에 한두 번 돌아오는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산사의 수련처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보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 보고자 하지만 십중팔구는 다시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만다. 그 중에는 진지하게 수행을 해보고자 선지식을 찾고 일상의 삶속에서도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지만 현시대의 오염된 환경은 다시 나태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한다.

 

 생전의 구산스님께 선방수좌가 찾아와 예배하고 물었다.

 “공부는 애써 하는데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수좌의 눈빛을 한참 바라보던 스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대답하였다.

 “공부가 될 수 있는 방법이 꼭 하나 있는데 그걸 가르쳐 줄까?”

 “예. 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공부가 되지 않을 때는 법당에 가서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도록 해라. 수좌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지른 허물을 낱낱이 기억해서 참회해야 하고 이 시대 인간들이 저지른 죄업까지도 수좌가 대신해서 참회를 해야 해.”

 

 큰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는 그 말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절실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참회와 발원은 수행의 길을 이끌어주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우리는 수천만생을 살아오면서 진리와 어긋난 삶을 살아왔다. 중생의 삶은 물질과 명예를 추구하는 아집과 탐욕의 까르마(業)로 되풀이된다. 수천만생 동안 쌓이고 얽힌 까르마를 녹여내지 못하고서는 자아의 본질, 공(空)을 체득할 수 없다.

 

 이 시대 모든 인간들의 악업과 죄악이 바로 ‘나’의 책임임을 통감하고 참회하는 행위야말로 대승보살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사람들을 일깨워서 진리의 삶을 향하게 하지 못한 ‘나’의 허물이 아닐 수 없다.

 

 인간들은 자기의 그림자 속에 서서 왜 이렇게 어두울까 생각한다. 까르마는 스스로의 그림자이다.

 

 

 2. 번뇌는 끓는 것이 아니다

 여기 억겁 동안 무지의 어둠에 쌓인 까르마를 녹이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무아(無我)를 깨닫고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불교의 수행이라 하면 번뇌를 끊고 욕망을 끊는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번뇌는 끊을 수 없고 욕망도 단절할 수 없다. 오직 질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다.

 

 고대의 성자들은 정욕을 통해 흐르는 에너지가 통로를 잘 맞추면 헌신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 에너지에 다시 열면 영적 체험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에너지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인격 또한 에너지의 형태에 따른 독특한 향기이다. 에너지가 가장 낮은 육체 수준에 존재할 때는 감각적인 욕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에너지가 감정 수준에 존재할 때는 사랑으로 나타나고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하면 영적 체험으로 나타나게 된다.

 

 대승불교에는 수많은 불보살이 신앙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 행원의 화신 보현보살, 원력의 화신 지장보살 등.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큰 바위 얼굴의 성자를 기다리던 소년이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불보살의 서원을 진실로 믿고 내마음 속에 부처님을 받아들일 때 중생의 에너지는 부처의 에너지로 바뀌어 간다.

 

 한국불교사상의 큰 흐름은 《화엄경》을 통해서 형성되었지만 현시대 불자들의 신행 경전은 《천수경》과 《금강경》이다. 《천수경》의 요체는 ‘자비(慈悲)’이며 《금강경》의 요체는 ‘무아(無我)’이다.

 

 무아법에 통달한 사람이 진실로 보살이라고 《금강경》은 말씀하신다.

 

 수십 년을 수행했어도 ‘나’라는 아상(我相)을 여의지 못했다면 범부일 뿐이다. 이 산 저 산 흐르는 물이 결국 한 바다를 향해 가듯 불교의 팔만사천 가르침 또한 무아를 깨닫고 자비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다.

 

 

3.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염불공부

 불교는 자기실현의 가르침이며 대안락의 법문이다.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지는 현대생활 속에서 선과 염불이 조화된 염불선의 수행법은 마음의 평정과 삶의 활력을 되찾아 주고 불교의 근본을 실현하게 해 줄 것이다.

 

 불자들은 경전과 전통에 의거한 수행의 실천을 통하여 잔잔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고요한 마음으로 관조하는 삶의 지혜와 기쁨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마당의 꽃밭도 가꾸지 않으면 잡초와 가시덩쿨만이 우거지게 된다. 마음의 꽃밭 또한 가꾸지 않으면 욕망의 잡초와 질투의 가시덩쿨이 자라나게 된다. 지속적인 명상의 실천으로 마음의 꽃밭에 아름답고 향기로운 한 송이 연꽃을 피워보자.

 

 《천수경》의 자비와 《금강경》의 무아를 한 마디에 갈무리한 거룩한 성호가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아미타불에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끝없는 광명, 무량광(無量光:Amitabha)은 무아(無我)를 상징하며 영원한 생명, 무량수(無量壽:Amitayus)는 자비의 상징이다.

 

 아미타불의 명호에는 일체 불법의 공덕과 정수가 함장되어 있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염불의 형식으로 인간의 자각을 통한 정토의 성취를 의미한다. 인간의 자각이란 인간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염불의 의미만 바로 알고 아미타불의 명호만 자꾸 불러도 업장이 점차로 녹아지고 지혜가 밝아진다. 진실로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이다.

 

 과거의 불교인들은 육시예불(六時禮佛)이라 하여 낮의 세 때와 밤의 세 때를 정해 놓고 규칙적인 기도생활과 신앙의 마음을 키웠다. 오늘의 불교인들은 하루에 두 번씩은 규칙적인 정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 우리 함께 염불하여 이 세상을 정토로 가꾸자는 노래가 있다.

 

 

염불발심가(念佛發心歌)

세상일에 골몰하여 항상 다투고

닦아야 할 성불의 길 뒤로 미루네

갖은 죄업 모진 고통 허덕이면서

이고득락 염불공부 외면하누나

 

(후렴)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 세상의 모든 인간 두루 살피니

애욕바다 태어나서 저 홀로 가네

이 세상을 하직할 땐 업보만 안고

가족 친구 많다 해도 저 홀로 가네

 

무아법을 깨우쳐야 보살이 되고

무상이치 통달해야 영원을 살리

대승진리 드높여서 불도 행하면

그 이름이 온누리에 두루 떨치리

(보현행원의 곡에 맞추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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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좋은 말씀에 마음 씻고, 머물다갑니다.... 고맙습니다...^.^ 2009-09-14 오전 8:58:53 덧글삭제
대원사 수선화님 좋은 느낌으로 머물다 가시길 바랍니다. 자주 들러 주세요.^^ 2009-09-15 오후 3:58:30 덧글삭제
청적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2011-03-10 오후 7:21:53 덧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