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서기 696년, 신라 계림의 왕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이 김흥광으로 뒷날 성덕 대왕이 되었다. 어머니는 성정 왕후다. 스님의 이름은 교각(喬覺)이고 학명은 수충(守忠)이다. 교각은 다른 왕가의 자손들과 달리 교만하지 않고 자애로웠고, 총명하여 언제나 학문을 즐겼다. 키가 7척에 기골이 장대하였고 무술에 뛰어났다.
서기 714년, 열여덟 살에 교각은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당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널리 교분을 맺고 학문을 닦던 교각은 소림사를 찾은 뒤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신라에 돌아왔으나, 왕실의 암투에 휘말려 교각의 큰아우가 태자로 책봉이 된 뒤에 교각은 어머니와 함께 궁밖으로 쫓겨났다. 왕위 다툼에 환멸을 느낀 교각은 절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탐구하다가 마침내 출가하였다. 자기의 신분을 숨기고 법명을 지장(地藏)이라 하고, 큰 서원을 세우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서기 719년, ‘지제(地諦)’라는 흰 개를 데리고 이상에 맞는 수행처를 찾아 당나라로 떠난 지장 스님은 항주 만불사에서 법을 펴다가 상서로운 꿈을 꾸고 여러 곳을 헤매다가 마침내
구화산에 이르렀다. 그때 구화산은 민양화(閔讓和)라는 부자 땅이었다. 스님이 민양화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던 어느날, 민양화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다.
스님이 “불법을 펼칠 땅을 찾고 있소. 몸을 기댈 가사자락을 덮을 땅이면 되겠소” 하자 민양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거야 못 구해 드리겠습니까”고 대답했다. 그때 스님이
가사자락을 펼치니 구화산 전체가 가사자락에 덮여 버렸다. 이에 민양화는 산을 희롱하는 듯한 스님의 도력이 광대무변함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자기 아들을 출가시켰으니, 그가 바로 도명(道明) 스님이다. 뒤에 민양화도 속세를 떠나 지장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구화산을 모두 시주받은 뒤에도 지장스님은 구화산 동쪽 골짜기 한 동굴에서 수행에만 전념했다. 전해오는 말로는 산신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내어 스님의 수행을 시험했다고 한다. 스님의 수행이 깊음을 안 산신이 감동하여 신령스런 약과 샘물을 공양 올렸다고 전해온다.
지장스님은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
『고음성다라니경』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이 네 경전을 사부대경이라 하는데, 스님이 머무시던 산에서는 사부대경의 필사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님이 몸소 백 리 밖에 있는 남릉南陵이라는 곳에 가려고 하자, 스님을 흠모하던 유탕兪蕩이라는 학자가 기꺼이 남릉으로 가 사부대경을 베껴
스님께 바쳐, 스님은 비로소 보배와도 같은 경전들을 얻을 수 있었다.
스님은 흰 개를 데리고 천대봉天臺峰 배경대拜經臺에 올라 고된 수행을 멈추지 않고 늘 마음을 다해 경을 읽었다. 스님의 정성에 관세음보살님도 감동하여 스님 앞에 몸을 나타내고 경을 듣곤 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은 봉황새와 푸른 용도 머물러 스님의 경 읽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배경대에는 깊게 파인 스님의 두 발자국이 남아 있다.
관세음보살님이 경을 듣던 곳에는 뒤에 옥석 하나가 길게 솟아올라 사람들이 이를 관음석이라 부르고 있고, 봉황이 머물던 곳에는 가파른 절벽이, 용이 경을 듣던 곳에는 마치 열매가 매달린 듯 기묘하고 위태롭게 솟아오른 암벽이 마치 촛대에 불을 밝힌 형상을 하고 있어 납촉봉蠟燭峰이라 한다. 스님이 우러러 경을 외던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리고자 후세 사람들이 납촉봉 남쪽 꼭대기에 천태사天台寺라는 웅장한 절을 지었다. 천태사 앞에는 구화산 최고봉인 시왕봉十王峰이 솟아 있는데, 해발 1342m에 이른다.
지장스님은 수행하는 동안에도 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자들을 이끌고 물길을 만들고 논밭을 개간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아, 그 때부터 지금까지 화성사 골짜기에는 논밭이 가득하다. 스님은 또 황립도黃粒稻를 신라에서 가져가 중국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여 가난한 산속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황립도는 도톰한 쌀로, 밥을 지으면 빛깔이 누렇고 향기가 그윽했다. 스님은 또 신라에서 가져간, 질이 아주 좋은 녹차인 금지차金地茶도 심었다.
스님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수행하면서 먹을 것이 모자라게 되자 하얀 흙으로 밥을 지어 먹으면서 고행을 했다. 756년 어느 날, 제갈 절이라는 관리가 산에 올라 동굴에서 선정에 들어 있는 스님을 보았다.
동굴 쇠솥에 드문드문 쌀이 섞인 흰 흙이 가득한 것을 본 제갈 절은 감동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스님을 위해 절을 지어 올렸다. 이 절이 구화산 화성사化城寺다.스님은 이 절에서 경전을 설하고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를 하루도 쉬지 않았다. 신라에서 스님이 돌아올 것을 바라고 스님의 두 숙부를 보냈으나 스님의 법력에 감동한 두 사람은 구화산에 남아 스님을 도왔다. 두 사람이 죽은 뒤 사람들은 이성전二聖殿을 지어 그 뜻을 기렸다.
스님의 어머니가 천리 바닷길을 건너 스님을 찾아와 신라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스님은 지금 떠난다 하여도 바다를 건널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슬퍼 사흘 밤낮을 울며 보내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스님이 날마다 화성사 앞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눈을 씻어 주니 마침내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우물을 명안천明眼泉이라 한다.
서기 794년 7월 30일, 스님은 나이 아흔아홉에 대중들을 불러 놓고 가부좌한 채 문득 세상을 떠났다.
스님의 몸은 돌함에 안치되었다. 세 해 뒤에 돌함을 열어 보니, 얼굴색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고 뼈마디에서 금쟁반을 흔드는 듯한 소리가 났다. 불경에 이르기를, 이런 소리가 나면 보살이라 하였다. 대중들이 이를 보고 스님의 영령이 다시 돌아온 것으로 믿었다.
대중들은 스님의 몸에 금분을 입혀 삼층석탑에 모셨다. 삼층석탑을 세우자 둥근빛이 눈부시게 일었다. 그런 까닭에 이 고개를 신광령神光嶺이라 불렀다. 뒤에 사람들은 탑 위에 법당을 세우고 앞에는 여든한 개의 돌계단을 만들었다. 이 탑이 지금의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지장스님은 구화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여 보살이 되었다. 이렇게 역사적인 인물이 보살이 된 것은 중국 불교 역사에서 유일한 일이다.
당나라 때에는 김지장보살상만 홀로 있었으나 당나라 뒤로는 김지장보살상 옆쪽에 "도명화상" 과 "민공의 상" 도 함께 세워졌다.
중국에는 특히 지장신앙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김지장스님이 육신보살이 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숱한 사람들이 김지장스님의 행적에 감동하였다. 조정과 황제도 감동하여, 명나라 때에는 은을 내려 절을 고쳤고, 장경을 내려 경배하게 하였다. 명나라 숭정제·청나라 강희제·청나라 건륭제가 편액을 올리고, 당나라 시인 이백을 비롯해 여러 문인들이 글을 지어 스님을 기렸다.
스님 뒤로 일천년이 훨씬 넘도록 구화산에는 은은한 향 연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 구화산에는 절이 여든네 개가 들어서 국제적인 불교 도량이 되었다.
스님의 덕행이 이어져 구화산에서는 여섯 분의 고승이 깨달음을 이루어 그 기운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스님의 정신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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